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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12년(영양왕 23)에 살수(薩水 : 淸川江)에서 강을 건너는 수(隋)나라 군사들을 섬멸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朝鮮)의 수군(水軍)이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병(倭兵)을 격퇴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1019년(顯宗 10년) 2월에 침략한 10만여 명의 거란군을 감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강감찬 장군이 이끈 고려군은 갑자기 불어닥친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맹공격을 가해 전세를 장악 추격전을 벌여 거란의 주력군을 섬멸시켰다.
발해는 건국 초반기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대조영(大祚榮)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당에 보내고 당의 책봉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노력의 사례였다. 이를 통해 발해는 당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러나 발해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게 되자, 당과 신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나서기 시작하였다. 당은 발해의 배후에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포섭하여 726년 흑수부(黑水府)를 두었고, 이러한 압박에 맞서 발해는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양측의 연결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긴장관계에 대해 당시 발해왕 무왕(武王)의 아우 대문예(大文藝)는 당과의 화친을 주장하다가 결국 당으로 망명하였다. 당은 그의 송환을 요구하는 발해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발해를 분열케 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였다. 발해에 대한 당의 정책을 확인하게 된 발해는 당의 해군기지였던 등주(登州)를 선제공격하였다.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발해군은 등주를 공격하여 곧 있을 양국의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였다. 1998년 이광호(李光浩) 화백이 제작하였다.
대조영(大祚榮)과 고구려 유민(高句麗 遺民)들이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동모산(東牟山)으로 이주하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한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발해 건국의 주체들이 희망과 앞으로의 기대를 담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건국의 사실을 알렸을 상황을 상상한 모습이다. 이광호(李光浩) 화백이 1998년 제작하였다.
대한해협해전을 그린 기록화이다. 1950년 6월 25일 밤,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후방 침투를 시도하던 600여명 탑승 규모의 북한군 무장 수송선을 발견하여 추적 끝에 격침시켰다.
6·25전쟁 개전 초기 단 한대의 전투기도 보유하지 못한 공군은 L-4 연락기를 출격시켰다. L-4 연락기 후방석에 탑승한 관측사가 적 차량에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조선 세종 16년(1434) 이후 10여 년에 걸친 육진(六鎭 : 慶源, 鏡城, 會寧, 慶興, 隱城, 富寧) 개척 당시 김종서(金宗瑞) 장군 지휘하의 조선군이 두만강 유역에서 여진족을 토벌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유화이다.
조선전보실기(朝鮮電報實記)는 메이지 전반기까지 유행한 일본의 목판화물로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을 묘사하고 있다.
1894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입성하는 대원군의 모습을 묘사한 목판화물이다.
조선, 일본, 청나라 삼국의 주요인물들 사진을 담은 석판화물이다. 조선의 국왕과 대원군의 그림이 있다.
明治三八年史(메이지 38년), History of 1905년이라는 제목이 붙은 풍자화이다. 러일전쟁의 주요 사건을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을 새장에 가둬두고 '보호조'라고 비하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