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權慄, 1537-1599)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