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강감찬

  • 성별

  • 시대

    고려시대

  • 비고

  • 키워드

    흉상, 강감찬, 고려, 호국인물, 전쟁역사실

약력
    . 출생-사망: 948-1031
    . 983년 문과 장원 급제
    . 1019년 거란 격파
    . 1030년 문하시중(門下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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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장군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며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초명은 은천(殷川)이다. 948년 금주(衿州 지금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났다. 983년 과거에서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010년에는 거란의 침공으로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갔을 때 호종(扈從)하였다. 1019년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을 때 총사령관격인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장군은 고려의 20만 대군을 영주에서 홍화진에 이르는 지역에 주둔시키고, 정예 기병 1만 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 두고 거란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거란군이 이를 모르고 진격해 오자 막아두었던 물을 트고 매복해 있던 군사에게 공격명령을 내려 대승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진공계획을 바꾸지 않고 진군을 하자 고려는 개경 일대에 계엄을 내리는 지경에 처하였다. 거란과의 결전은 2월 1일에 있었던 귀주대첩이었다. 귀주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비바람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거란군에 맹공격을 가해 전세를 장악하고 추격전을 벌여 거란군의 주력군을 섬멸시킨 것이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해 침략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1030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현재 정부에서 수여하는 ‘인헌무공훈장’의 명칭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인 ‘인헌’에서 유래했으며 출생지인 낙성대에서 봉천동에 이르는 도로는 장군의 초명을 따서 ‘은천로’라고 부른다. 오석 좌대 위에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이 설치된 형태이며, 얼굴 모습은 영정을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고려시대의 갑옷인 경번갑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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