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1435년 함길도병마절도사(成吉道兵馬節度使)를 겸직, 야인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여 그 비변책(備邊策)을 건의했다. 자는 국경(國聊), 호는 절제(節齊), 본관은 순천(順天), 도총제(都摠制) 추(鍾)의 아들.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이 되고, 지평(持平), 집의(執義),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1449년 권제(權踶) 등이 수교(讐校)한 고려사(高麗史)가공정하지 못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그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직,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총재관(摠裁官)을 거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다. 이해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황보인(黃甫仁) • 정분(鄭苯)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했다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보필하던 재상가운데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은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로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일찍이 고려사 개찬의 총지휘를 맡았으나 정인지(鄭麟趾)가 총재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대역모반죄로 말미암아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시조 2수(首)가 전한다.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초기의 정치, 외교가이자 장군으로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993년에 고려를 침략한 거란 장수 소손녕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침략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인식시켜 병력을 철수케 했다.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축출하고 장흥진, 귀화진, 과주, 귀주, 흥화진 등에 성을 쌓아 강역을 압록강 유역까지 넓혔다. 전시품은 서희 장군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임동춘 육군 대위는 1949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김제 죽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군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230기로 입교했다. 1969년 8월, 육군 소위로 임관 이후 서부전선 소대장과 제2하사관 학교 교관을 거쳐 1971년 8월 31일 파월되어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2중대 1소대장을 역임했다. 1972년 3월, 월맹군은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는데, 안케고개 일대도 그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안케고개는 월맹군 제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19번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핵심 요충지였다. 안케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월맹군은 3월 중순부터 남하하여 638 고지를 비롯한 주요 지점을 확보하고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1일 새벽, 1개 연대 규모의 월맹군이 19번 도로를 점령하고 638고지 가까이에 있는 아군 기갑연대 1중대 기지를 습격함으로써 안케전투가 시작되었다. 안케고개가 차단되자 아군은 수색중대를 투입해 정찰을 시도했으나 적의 기습으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638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뒤이은 공격에서도 피해만 늘어날 뿐 진척이 없자 4월 22일, 임동춘 중위(당시 계급)가 속한 제2중대가 전면에 나섰다. 임 중위는 직접 특공대를 편성하고 선두에 나서 수류탄으로 적의 제1방어선 벙커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임 중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공격을 계속 감행하여 5개의 벙커를 폭파시켜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적의 집중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1937년 인천에서 출생한 강재구 소령은 인천 창영 초등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 3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6기로 임관했다. 이후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연대 소대장, 제1야전군 부사관학교 교관 등을 역임했으며 1965년 월남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수도사단 제1연대 3대대 10중대장으로 부임했다. 1965년 10월 4일 강재구 중대는 월남파병을 앞두고 훈련을 총결산하는 수류탄 투척훈련을 실시했다. 이때 병사 한 명이 수류탄 투척을 위해 안전핀을 뽑고 손을 뒤로 젖힌 순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수류탄을 손에서 놓쳐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병사의 직후방에서 훈련을 감독중이던 강재구 대위는 위기를 직감하고 자신의 몸을 덮쳐 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구했으나 자신은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이러한 고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뜨거운 부하사랑은 파월장병뿐 아니라 전 군에 귀감이 되었고, 온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정부는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1965년 10월 육군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강재구 소령이 속했던 3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 되었으며 육군은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부하사랑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66년 ‘재구賞’을 제정해 매년 모범중대장을 선발해 시상하고 있다. 또 모교 서울고교에는 기념비가, 육군사관학교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고인이 산화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에 위치한 ‘강재구기념관’에는 추모비가 세워져 고인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40년 서울에서 출생한 지덕칠 중사는 1963년 1월 해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같은해 8월 해군 군의학교를 수료한 후 1966년 해병 제2여단 1대대 2중대 3소대위생하사관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지덕칠 중사가 속한 1대대는 1966년 2월 1일 꽝웅아이 성 바딴간 반도 지역을 흐르는 강 하구에서 수로를 탐색하는 미 해병대 수중폭파반 (UDT) 활동을 보호하는 ‘강구(江口)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응급 치료하던 중 적의 총탄에 어깨와 다리 관통상을 입었으나 적 20여명을 사살한 후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에 지덕칠 중사의 희생을 기려 1967년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윤관은 고려의 문신이며 장군이었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경(文敬)이라 했다가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1107년(예종 2)에는 여진정벌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별무반(別武班)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동음성(冬音城)·석성(石城) 등 135여 곳에서 휘하 장수를 지휘하여 여진을 섬멸한 것이다. 탈환한 곳을 국토로 삼고 9성을 축조하여 영토확장과 변방 수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제26대 영양왕대의 장군으로 612년 수나라 113만 대군의 침공에 맞서 고구려를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당시 고구려의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최고위급 관료였음을 알 수 있다. 612년 수나라의 침공은 침공 병력만 113만에 달할 정도로 수가 전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또한 수의 침공군은 요동(遼東)을 가로질러 고구려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육로군과 고구려의 수도를 직공하려는 수로군으로 나뉘어 침공하였다. 을지문덕이 이끈 고구려군은 수의 육로군을 요하 일대의 국경선에서 저지하여, 대군을 투입하여 각 방면으로 병진(竝進)하려던 수의 전략을 무산시켰다. 이에 수는 별동대 30만을 뽑아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의 지휘로 고구려 수도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수로군과 연결하여 고구려의 중심부를 직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직접 적정을 살펴 그 허실을 정탐하여 이후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을지문덕은 적의 군사력을 소모하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적군을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뒤늦게 함에 빠진 것을 깨닫고 회군하던 수군은 살수(薩水 현재의 淸川江)에서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을지문덕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던 인물이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신라 진평왕 17년에 태어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신라 화랑 출신의 장군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그 후 태종 무열왕(김춘추)을 도와 당의 세력을 국내에서 물리치고 자주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문무왕 13년 79세로 생애를 마쳤다.
계백(階伯: 미상~660)은 백제말, 의자왕(641-660)대의 장군으로 국운이 기울어진 틈을 타서 침공한 신라와 당의 연합군 십여만 대군을 군오천기(軍五千騎)로서 4차에 걸쳐 격파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사하였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장군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며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초명은 은천(殷川)이다. 948년 금주(衿州 지금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났다. 983년 과거에서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010년에는 거란의 침공으로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갔을 때 호종(扈從)하였다. 1019년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을 때 총사령관격인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장군은 고려의 20만 대군을 영주에서 홍화진에 이르는 지역에 주둔시키고, 정예 기병 1만 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 두고 거란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거란군이 이를 모르고 진격해 오자 막아두었던 물을 트고 매복해 있던 군사에게 공격명령을 내려 대승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진공계획을 바꾸지 않고 진군을 하자 고려는 개경 일대에 계엄을 내리는 지경에 처하였다. 거란과의 결전은 2월 1일에 있었던 귀주대첩이었다. 귀주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비바람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거란군에 맹공격을 가해 전세를 장악하고 추격전을 벌여 거란군의 주력군을 섬멸시킨 것이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해 침략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1030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현재 정부에서 수여하는 ‘인헌무공훈장’의 명칭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인 ‘인헌’에서 유래했으며 출생지인 낙성대에서 봉천동에 이르는 도로는 장군의 초명을 따서 ‘은천로’라고 부른다. 오석 좌대 위에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이 설치된 형태이며, 얼굴 모습은 영정을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고려시대의 갑옷인 경번갑으로 표현하였다.
최영(崔營, 1316~1388)은 고려 말의 장군이며 재상(宰相)이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후 나타난 이인임(李仁任) 정권은 최영과 함께 공민왕 이래의 외교노선인 친명책(親明策)을 버리고 친원책(親元策)으로 돌아섰는데 이를 둘러싸고 이성계, 정몽주 등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375년에는 왜구의 침략이 격화되자 출정하여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388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서경에 머물면서 전쟁을 총지휘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38,8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정벌을 위해 북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민수를 회유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권율(權慄, 1537-1599)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