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김화순

  • 구술주제

    노무자로서 겪은 6·25전쟁

  • 구술일자

    2022-09-10

  • 영상시간

    11분 35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시네마영상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김화순 구술자는 6·25전쟁 발발 당시 미7사단 31연대 소속 노무자로 참전했다. 가평, 양구, 김화 등지에서 노무자 생활을 하다가 화상을 입어 육군병원에 입원했으며, 퇴원 후에는 미군부대에서 식당보조원(KP)로 복무했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2022년 올해는 전쟁 직전부터 정전 체제까지 전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대상자로 선정하였고, 특히 백마고지 전투 70주년을 맞이하여 전선교착기에 해당되는 '고지전' 중심의 참전자 및 관련자를 선정하였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되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더보기
구술자 약력

성명김화순

  1. 1946. 청양초등학교 졸업
  2. 1951. 논산으로 피란 갔다가 노무자 지원
  3. 1951. 미7사단 31연대 노무자 생활
  4. 1952. 화상으로 육군병원 입원
  5. 1953. 퇴원 후 미군부대 식당 보조원 종사
  6. 1953. 제대 후 서비스업 종사
  7. 1954. 김화읍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농업 종사
구술영상 자막
<김화순>
*면담자: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면담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구술자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학사1리 구술자이에요.

면담자 : 전쟁이 일어날 당시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저희는 가족이, 내 동생이 남자 하나하고 여자 갓난아기가 있어요. 젖먹이. 그리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어요. 우리는 그때 저 나이가 17살이었는데, 그냥 농사짓고 그냥 그러니까 전쟁 나기 전에는 (전쟁이 난 줄) 몰랐어요. 전쟁 준비로 그냥 그렇게 하는 게 훈련인 줄만 알았지. 전쟁이 나려니 생각은 안 했었죠. 우리 아버지도 치안대인데, 패잔병이 이제 여기로 내려올 거라고 해요. (인민군이) 오면 붙잡아가니까는 빨리 가서 10리만 (도망)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오라고 했어요. 아침에 들어오려고 하니까 벌써 인민군이 김화 학사리를 와서, 초소에다 불을 지르고, 학사리 치안대들이 막 도망을 가는 거예요. 산에서 막 (총) 쏘고 그러니까 (산으로) 못 가고 도망을 허니까[하니까] 우리도 그다음에 도망을 쳐서 또 남쪽으로 다 오는 거죠. 

면담자 : 어떻게 노무자가 되셨나요?
구술자 : “가평 비행기장[비행장] 닦으러 간다.”고 그래서 “지원을 하라.”고. 그래서 우리 같은 애들이 많아요. 혼자 나온 애들이. 그 애들은 100% 다 (노무자로) 가는 거죠, 뭐. 그 부모들이 있는 사람들은 부모가 못 가게하고, 자기가 데리고 있고, 그러니까 못 가고. 혼자 있는 애들은 다 그냥 (갔어요.) 노무자라고도 부르고 비행기장[비행장] 닦으러 가는 게 다 노무자죠. 뭐. 거기 이제 가는데 기차로다가, 이제 곳간차에다가 안에 가득가득 앉혀 채워갖고서는.         전라도 전주, 이리 그쪽에서부터 모집해서 오는 거예요. 

면담자 : 처음에 도착한 부대가 어디였나요?
구술자 : 처음에는, 우리는 저 나중에도 거기 있어지마는, 미 7사단 31연대. 7사단에 와서, 7사단 차가 와서 실어 가는 거예요. 실어 가는데, 그게 이제 31연대라고 해요. 31연대 이제 가평으로 왔어요. 가평. 가평으로 왔는데, 이제 38선 방어진지를 파는 거예요. 전투 부대는, 한국군이 전방에 화천까지 탈환을 했는데, 그다음에 거기서 한 달 동안을 이제 방어진지를 팠어요.

면담자 : 적극산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구술자 : 그다음에 우리가 적근산에 이렇게 갔는데, 화천 발전소 밑에 그 강변에다가 (있었는데) 뭐 아주 개울에 그냥 잉어들이 허옇게 둥둥 떠 있고 그랬어요. 사람들 죽은 것도 여기저기 많고. 그런데 대뜸 가서 그거를 지고 올라가래서 갖다 주고 오고. 그다음에 또 길을, 적근산을, 또 길을 이렇게 다시 닦는 거예요. 그때 케이블카도 놓고 그랬어요. 케이블카를 놓고 시운전도 하고, 케이블카로 달아 올리려고, 이렇게 탄약이랑[과] 달아 올리고, 연습도 하더라고요. 처음에. 그런데 또 우회로다가 길을 닦는 거예요, 적근산 꼭대기까지. 중간까지 닦았는데 그다음에 차 올라가는 데까지 우리가 또 거기를 이동을 해서 간 거예요. 그러니까 적근산 전방에 가서 또 군이 전투하고 있고. 적근산 꼭대기 또 방공호를 파고 거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다음에 그 적근산 중간까지 차가 올라가니까 거기까지 가서 이제 산비탈에다 천막을 치고 있었거든요.

면담자 : 미군과 계약서를 작성하셨나요?
구술자 : 우리는 그냥 뭐 오고 갈 데도 없고 그러니까 주는 밥 먹고 시키는 대로 그냥,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냥 이러는 것뿐이죠. 뭐. 

면담자 :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낀 때가 언제인가요?
구술자 : 그때는 저 CTC예요. CTC. CTC가 있고, CTC 가 있다가 그다음에 KSC(Korean Service Coprs, 한국노무단)라고 또 뽑았어요. CTC에서 KSC를 뽑고, 그다음에 나이가 적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KP(Kitchen Police, 취사지원)로다 보냈어요. 식당으로다가. 그걸 KP라고 그래요. 그때 이제 나도 나이를 이제 두 살인가 줄였어요. 두 살 줄여서 식당으로 오라고 해서, 40 넘은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이제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를 줄였어요. 저희도 또 KP로 데려가야 식당에서 일을 하겠으니까는, KP로 네 사람은 이제 중포중대죠. 헤비모로컴퍼니(Heavy Motor Company, 박격포중대)라고 거기를 갔어요. 그러니까 KP로다가 계속 식당에서 일하는 거죠. 그릇 닦아주고 솔 닦고, 심부름하고. 그 다음에 CTC가 없어진 거예요. CTC가. 중간치는, 일할 사람은 KSC로다 다 뽑아가고. 그다음에 나머지 찌그럭지는 KP로 식당에 가고. 아주 적은 애들은 또 하우스보이로다 가고.

면담자 : 예전에는 KP를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했죠?
구술자 : 전방 고지에 밥 갖다 줘야지, 갔다 오면 또 물 갖다 줘야지. 또 탄약 없으면, 탄약 갖다 줘야지. 또 가시철망이나 다른 거, 보급품도 옷도 갖다 줘야 되고, 뭐 이런 거. 보급품을 져다줘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에 CTC를 갔는데 옷이 뭐냐 하면 퍼런 중의적삼. 죄인이 입는 거 그런 거 줬어요. 그렇게 입으니까 저기에서 적군에게 더 잘 보이죠.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옷 지고 올라가려면 우선 나부터 갈아입고서는 나머지를 지고 져다주는 거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많이 모아다놓고 있으면 미군이 와 봐요. 개인 천막도 보고 이렇게 들어 보면, 백에다가, 옷이나 이런 거 많이 주워다가 싸놓은 사람이 있어요. 가져가려고, 우리는 갈 데도 없으니까 그런 거 할 생각도 안 하는데. 그러면 미군이 와 보고서, 천막마다 보따리가 한 보따리씩 이렇게 많으니까 와서, 차로 와서 다 실어 가요.
더보기
구술사진

20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김화순 노무자
관련 자료
닫기

통합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