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안태진

  • 구술주제

    이북 출신으로 휩쓸려 겪은 6‧25전쟁

  • 구술일자

    2022-09-05

  • 영상시간

    9분 37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6‧25전쟁실2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안태진 구술자는 6·25전쟁 발발 당시 함경북도 길주의 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50년 12월 국군 퇴각 때 흥남으로 피란을 가서 학도병에 자원했으며, 수도사단 기갑연대에서 포병으로 활동하였다. 향로봉전투와 금성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2022년 올해는 전쟁 직전부터 정전 체제까지 전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대상자로 선정하였고, 특히 백마고지 전투 70주년을 맞이하여 전선교착기에 해당되는 '고지전' 중심의 참전자 및 관련자를 선정하였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되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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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안태진

  1. 1950.7. 길주 농업전문학교 졸업
  2. 1950.7 함경남도 북청 국영농장 배치
  3. 1950.10. 북청에 국군 입성
  4. 1950.12. 국군 퇴각에 합류하여 흥남으로 피란
  5. 1950.12. 학도병 자원
  6. 1951. 수도사단 기갑연대 탄약병기과 배속, 병기학교 입교
  7. 1954. 입원치료 후 제대
구술영상 자막
<안태진>
*면담자: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면담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구술자 : 제 이름은 안태진, 생년월일은 1931년 11월 20일생입니다. 태어난 곳은 지금 함경북도 길주라고 있습니다. 길주의 시골인데, 길주군 웅평면 영천리 200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면담자 :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때가 언제인가요?
구술자: (북한에서 살 때) 전쟁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깨달았는고 하니까, 전문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는 현장 실습을 많이 보내니까, 함경남도 안변 와서, 38선 근처입니다. 안변 지역에 와서 거기 와서 국영농장하고 이렇게 쭉 실습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 당시에 보니까 기차가 이남 나가는 기찻길이 있는데, 그때 보니까 화물차에다 전차 같은 거 싣고, 포 같은 것도 싣고 이런 거 보니까, ‘야, 저기 전쟁할 때 쓰는 거구나!’하는 걸 거기에서 그때 약간 감지했죠. 그래놓고는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7월 달에 실습 마치고, 7월 초에 실습 마치고. 학교에 다시 돌아가서 다시 또 졸업시험 치고 할 때인데, 그때도 6·25 난 줄도 잘 몰랐어요. 6·25 다 나고 일단 졸업시험 치고 7월 한 초순에, 7월 8일인가? 그때 졸업 다 했어요. 졸업하고 나니까 일단 직장을 다 배치해 주는데 함경남도의 국영농장으로 배치 받았어요. 

면담자 : 흥남부두에 도착하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요?
구술자 :  농장에 와갖고는 오니까 젊고 하니까 게시판에 6·25전쟁이 나갖고, 현재 요새는 어디까지 내려가고. 자꾸 전진해 내려가 갖고. 얼마 안 가면 (남한을) 함락시킨다고 말이죠. 아주 점령한다고, 완전히 부산까지 가서 아주 점령해 버린다고. 자세히 보니까 아침에 게시판이 (지도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 인민 군기를 다는 거 보니까, 밤새우고 나면 자꾸 인민군 국기가 저기 다 붙어 있더라고. ‘야! 이거 얼마 안 가게 되면 완전히 이남도 완전히 통일시키겠구나!’하고. 그래서 그런 것만 알았지.

면담자 : 인민군과 국군에서 모두 훈련을 받아보셨습니다.
구술자 : 나중에 가서 딱 집합해서 딱 행군해 갖고 들어갔어요. 그 다음부터는 훈련시키는 거야. 훈련시키는데 아침부터 나와 갖고 말이야. 1등병, 2등병들이, 기간사병들이 나와서 훈련하는데 처음 나와 갖고. “앞으로 갓!” 하게 되면 북한에서는 이렇게 하잖아. 교관이 시범 보인대. “너희들이 옛날 왜놈 군대들은 봤지?” 그럼 왜놈 군대 봤다고, 왜놈 군대가 팔을 곧장 펴서 이렇게 하는데. 우리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인민군 방식이) 그때부터 습관이 되어갖고. “이 새끼! 앞뒤로 팔을 꼬지 말고 여기는 막 이렇게 하라.”면서 때리니까 겁이 나갖고 정신 차리고. 그냥 대번 되는거지. 습관을 바로 고치는 거죠.

면담자 : 6·25 때 모든 부대가 병사들 밥도 안 먹이고, 전장으로 내보냈다고 사람들이 오해하기도 해요.
구술자 : 그렇지. 처음 들어가니까 거기서 아주 그냥 밥도 그렇게. 자체 내에서 밥하는데 나중에 한 1년 지나고 있으니까. 연대 단위고, 연대 CP, 본부중대 있고, 근무중대 있고. 그다음에 그 사람들 있을 때는 연대본부에서 취사장들이 밥 지어갖고, 그다음에 그냥 다 배식해주더라고. 그 전에는 단위별로 이렇게 밥 지어 먹으니까 아주 어떻게든지 잘 먹었어요. 그런데 연대에서 취사할 때는 아우, 그때는 밥이 적어. 밥이 양이 적었죠. 

면담자 : 마지막 전투였던 금성전투를 직접 겪으셨는데요.
구술자 : 아군들이 혹시 여기서 중공군들은[이] 나와서 교전하게 되면 전방에 있는 걔들이 소동난다 이거야. 전방을 진지하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총성이 나게 되면, 이게 괜히 소란하게 되면 안 되니까 부사단장(임익순 대령)은 그 사람이 슉 들어가 갖고 걔들 거기 앉아 있고, 아군들을 주저항선 그 뒤에서부터 그놈들은 일단 여기에서 가지 못하게 가둬놓고 잡자고 말이지. 이렇게 했는데 연대장(육군수 대령)은 “여기서부터 한다.”, 부사단장은 “전방에 더 들어가갖고 이렇게 훑어 내려온다.”그렇게 작전에 차이가 있어서. 그래서 사단장이, 그때 어느 사단장인가? 송요찬이는 아니야.  “야, 이 새끼야!” (소리치면서 전화기 너머로 명령하는데) 부사단장이 좌우간 중공군 많이 때려잡았대요. 연대장하면서. 그래서 부사단장으로 명전한 사람이거든요. “작전을 잘하니까 거기다 (부사단장에게) 맡기라는 말이야.” 그래서 연대장이 탁 전화기 놓고 나와서 한참 올라가는데, 중공군한테 다들 이제 전방에 가게 되면, 아군들 병력이 있는 데까지 내려가게 되면, 작전이 어떻게든지 하니까. 중공군을 거기서 만난 걸 나는 그때 못 봤어. 애들이 보고 와서 말하는데 (연대장한테) 옆구리에 총 대고 말이지. 손 들으라고 말이야. 권총이라고 하면서 (연대장) 권총을 뺏으려고 하는데, 연대장이 권총 뺀다고 하는데. 그런데 뭐라 말하더니 그냥 갈겨버렸어. 갈겨버리면 거기서 이제 쓰러져. 거기 (있던) 연락장교고 뭐고 거기 있던 사람들 냅다 튀고, 연대장은 거기서 쓰러지고. 바로 손 들라고 했는데 안 들고, 권총에 손이 가니까 그냥 거기서 갈겨버렸대요. 그러니까 부사단장은 손 들라니까는 얼른 손 들고, 저 사람 포로됐다고 그러더라고. 나는 몰랐어요. 나도 이번에 들었어. 누가 그래요. 그 사람은 중공군한테 포로 됐다가 포로 교환에 나왔다고. 

면담자 : 육군수 대령(연대장)에 대해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일체 사병들한테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점잖은 분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면, 아침마다 연대 CP 들어가게 되면, 상황실에 들어가게 되면, 보통 전방에 배치된 부대들이 실탄 보유 현황을 다 체크해 놓거든요. 기본 병기가 얼마 있다 그런 거, 클립 같은 거, 다 군대에서 이렇게 정리해 놓고, 나오게 되면 자주 만나. “고생한다. 인마!”하고 (연대장이 말했어요.)

면담자 : 육군수 대령이 총을 맞는 장면을 직접 보셨나요?
구술자 : 그래, 거기서 총소리만 들었고, 그다음에 딱 그게 연대장이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차가 한 20대 쫙 세워놨잖아요. 제무시(2.5톤 트럭) 지금은 병력을 딱 세워놓고, 애들 거기서 신발 신고 다 준비하고 차에 앉아 있었는데, 연대장이 저격당한 뒤 트럭 앞에 하고 뒤에서 걔들 경기관총이 막 그냥 갈기는 거야. 그냥 차 어디 보닛 같은데 불이 팍 삐져나오고, 그냥 거기서 애들이 막 뛰어내리잖아요. 그런데 그 애들이 우는 소리 말이지. “소대장 님!” 막 부르는 거야. “선임하사 님! 나 이거 얼마 안 다쳤는데 날 좀 데리고 가.”라고. 그 우는 소리를 그대로 그냥 들으니까 말이지. 야, 이런 비참한 일이 어디 있냐고 말이지. 그런데 거기다 대고 이 새끼들이(중공군들이) 막 갈기는 거예요. 그 속에서도 애들이 나를 데리고 가라고 말이지. 막 울고불고 하는데 그 소리 들으니까 내가 그 한참 (잊지 못하고 있었어요.)  걔네들은 보게 되면 얼굴이 하얗게 정말 피 색이 없이 그렇게 고생만 해갖고 거기 나와 있었는데, 그것도 밤중에 차에 싣고 나왔는데. 차에 앉아 있다가 그냥 날벼락 맞은 거죠.


면담자 : 선생님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구술자 :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일체의 모든 허욕 아무것도 없이 그냥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런 욕심 (없이), 오직 고향 한 번 가봤으면 하는 그 일념, 그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제 와서 또 생각하니까 고향에 가도 다들 돌아가셨는데, 괜히 내가 이 속만 끓이는 거구나! 하고 다 잊자, 다 잊자 하고 지금 이래요. 그래서 고향 못 가는 거 언제든지 고향 한 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 그저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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