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김을로

  • 구술주제

    경찰공무원으로서 겪은 6‧25전쟁

  • 구술일자

    2022-10-04

  • 영상시간

    11분 27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6‧25전쟁실 2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김을로 구술자는 6·25전쟁 발발 당시 경남 산청경찰서 순경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전쟁 당시 함안 대산면 구혜리 고지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등의 활동을 하였다. 퇴직 후 6·25전쟁경찰국가유공자회장 역임 후 고문으로서 6·25전쟁 당시 경찰의 활동을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2022년 올해는 전쟁 직전부터 정전 체제까지 전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대상자로 선정하였고, 특히 백마고지 전투 70주년을 맞이하여 전선교착기에 해당되는 '고지전' 중심의 참전자 및 관련자를 선정하였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되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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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김을로

  1. 1950.2.8. 산청경찰서 사찰계 순경 임명
  2. 1950.8.31. 함안 대산면 구혜리 고지에서 9시간 전투 후 승전
  3. 1950. 북진 경찰 자원
  4. 1950. 압록강까지 갔다가 후퇴하며 산청 복귀
  5. 1951.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투입
  6. 1951. 지리산 공비 이현상 부대와 전투
  7. 1953.8. 지리산 공비 송관일 소탕 공로로 경사 특진
구술영상 자막
<김을로>
*면담자: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면담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구술자 : 1928년 7월 15일생. 이름은 김을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에서 태어났습니다.

면담자 : 경찰에 언제 임용되셨고 전쟁 전에 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셨나요?
구술자 : 그 도망을 오면 반란군을, 빨갱이를 잡으려면 군인들이 와도 지리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깐 “지리를 알려주는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뭘 지리도 많이 알고 여러 가지를 잘 아는 사람이 나다. 이렇게 해서 뽑히고 내가 지리 안내를 하게 돼 있어요. 지리 안내로 그래가지고 이제 지리 안내를 해서 민간인으로서 군인들 앞에 서서 총을 메고 좀 하다가, 그러면 자동으로 집에 오니까 벌써 이거 나는 빨갱이한테서 (적이 되어있었어요.) 주민들이 그 당시에 거의 빨갱이라, 주민들이 거의 다 말하자면 우익, 지금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사람들 별로 없고. 왜 그러냐면 그때는 좌익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지주들 논을 다 소작인들 나눠주고, 또 지주들이 재산도 나눠주고 이러니까 빨갱이를 다 지지하는 거야. 전 국민이. 전부 그런 식으로 다 국민이 따라 가는데 거기에 이제 내가 빨갱이를 잡는데 안내를 하러 다니다 보니까 어느 날 우리 집에 날 잡으러 왔어요. 내가 없을 때인데. 날 잡으러 왔는데 내가 그때 출타하느라 없었는데 출타해서 없어서 (살았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오면 나는 잡히면 죽는다.’그러니까 나는 집에서는 항상 못 자고 집에 어쩌다 오면 밥 먹고 나서 밤에 저 하천가에 가서 누워 자고. 그래 또 날 새면 들어오고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떤 경찰관이, 위에 높은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는 용모도 단정하고, 아는 것도 많고 경찰관을 시켜도 훌륭한 경찰을 하겠는데. 경찰을 하라.”라고 권유를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원래는 그거 할 생각을 안 했는데 그렇게 시켜서 보니까 뭐 별 것도 아니고 상식이 좀 (많았어요.) 우리는 일제 때 일본 역사를 배웠지만도, 한국 역사는 태정태세문단세도 (몰랐어요.) 그래 우리 뒤에 애들에게 들은 이야기, 우리 한국 역사 제일[가장] 몰랐는데 그래 역사도 좀 하고 (공부) 하니까 취미도 있고 이래가지고 그래서 내가 경찰관을 마음에 들어서 했어요.

면담자 : 출동해서 어떤 임무를 맡으셨나요?
구술자 : 6·25 나가지고[나서] 출동 명령을 들어서 내가 산청서에서 2개 소대 60명이 출동을 해서 “경남함양경찰서장 진기찬 서장의 지휘를 받아라.” 이렇게 이제 오더(Oreder, 명령)가 내렸어요. 그래. 내가 제1소대에 편제 되어가지고, 우리 소대장은 백남현이라고 경비주임인데, 백남현의 소속이 되고 또 다른 소대는 한선우라고 수사주임 소속인데, 그 이제 2개 소대가 갔는데 어디냐 하면 전북 무주, 장수와 경남 함양 안의와 경계에 60령재가 있어요. 우리가 이제 그 함양 60령재에 가니까, 벌써 가니까 북한군이 먼저 와 있는 기라. 저쪽에서 이쪽에서 고함지르고, 우리 있는 데다 포를 때리지 이러니까는 뭐 정신이 다 없어. 팔이 날아가는 사람이 있고. 아이고, 아이고 다친 사람 만질 여유도 없이 도망가기 바쁘고. 남쪽으로 가야 아군이 있는지, 북쪽으로 가야 있는지 것도 모르고. 천지도 모르고, 이리 가는 사람, 저리 가는 사람. 후퇴 명령도 없고 개판이란 말이야.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총탄을 피해서 이리 가야 될지 저리 가야 될지. 알아서 가는데 누구 말도 할 것도 없고. 간신히 피해서 산청서로 가보니까 산청서는 벌써 저 전 서원이 후퇴해서 진주경찰서창 이청용 총경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이 내렸는데, 진주를 벌써 인민군이 와서 진주는 인민군이 점령했었어요. 그래서 진주에는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꿍꿍꿍 하고 말이지. 진주는 못 갔어요. 그러니까 진주는 못 가고 경남 의령으로 우회를 해서 의령을(으로) 해서 지방 도로로 이제 내려가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더우면 가로수 밑으로 요리요리 빠져서 이래가지고. 그래서 함안 군복까지 빠지고 이랬지. 

면담자 : 함안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구술자 : 우리는 후퇴 내려가서 함안 대산면 구혜리. 거기서 8월 31일에 아까 이야기했지만, 김일성이가[이] 수안보까지 내려와서 전방 전투 지휘관한테다[에게] 지휘를 하기를 8월 21일까지 마산을 점령하고. 9월 1일 날은 “마산에서 김해까지 가려면 아무 장애물 없이 바로 돌진해서 갈 수 있으니까는, 부산 갈 수 있으니까는 거기서 적화통일 기념행사를 거행하라.”라고 김일성이 오더 내리는 거라.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런 상황을 파악을 해서 그 전봉조 서장이 8월 31일날 우리 대산리 구혜리 고지 오후 6시. 오후 6시 되니까 호위병 둘이 하고 와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꼭 지켜야 된다.”딱 이러면서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쭉 흘리다 봐요. “오늘 국가 운명은 백척간두에, 깃대에다가 말하자면, 서 잇는 그런 운명과 같다.” 이거야. 말하자면, 어, 그러니까 “여기에서 대한민국이 없어지면 대한민국이 없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부모도 없고, 형제간도 없고, 땅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지니까. 여기서 촌보(寸步, 짧은 거리)라도 물러날 생각을 하고 전투를 하면 안 된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고 전투를 하라.” 이래.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호소를 했어요. 가고 나서 한 10분인가 20분 있는데 박격포가 우리 고지에 막 ‘펑펑펑펑펑펑펑!’떨어지는 거야. 그러니 당장 팔이 하나 날아간 사람은 아이고, 그거 죽는 사람. 조금 있으면 우리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이거 막 철조망에 가마니를 이렇게 깔고 위로 넘어가서 “돌격!”하고 오는데 보면,  17살, 18살이 따발총을 가락가락가락 갈기고 오는데 전투할 능력도 없고, 사기도 다 죽고 어찌 하지도 못 하고. 가지고 있는 총 가지고 왔는데 마침 그때 기관총 2정하고 수류탄 1,000발을 받아놓은 게 있어서 미군, 우리 고지에 30명이 미국 전초병이 와 있었거든. 우리가 경찰이 58명하고 그래가 있었거든. 그래가지고 그걸 받아가지고 고지에서 수류탄 1,000발을 다 던지고. 기관총 2정이 다 날라 실탄이 다 떨어지고 다 하고. 그리고 아침에 6시 되니까 미 정찰기가 오더만은, 정찰기가 오니까 저 대공, 말하자면 이제 전황을 갖다가 보고를 했는데. 그래가지고 인민군을, 생포를 37명을 하고, 사살을 확인을 한 것도 370명이 하고. 그 앞에 유실된 거는 그때 인민군이 우리한테[에게] 온 게 4사단, 6사단, 7사단, 9사단, 15사단, 기계화사단 6개 사단이 우리한테 왔는데, 우리한테 전멸 당했어. 그래가지고 엄청난 전과를 올렸어. 그래. 8군 사령관이, 그때 대한민국의 최고 높은 사람이 8군 사령관, 육군 총장이 비행기로 와서 “세계 전시에서 경찰이 이리 전과 올린 거는 역사적으로 없다.” 극찬을 하고 갔어요.

면담자 : 6·25전쟁 속 선생님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설명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구술자 : 저때 뭐야? 애국심이지. 뭐야? 애국심. 경찰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가지고 임명된 사람이고, 그리고 뭐 또 그 이전에 인간적인 측면에서 사상 이전에라도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 그런 것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처자가 있고 살림을 사는 사람을 갖다가 그것도 소위 재판 형태를 갖추면 모르지만도, 지금 완력에 의해서 떼거리로 와가지고 애들이 잡아다가 가면 산에다 다 걸어 나무에다 다 걸어매 버리고, 창으로 쑤셔 죽이고. 그래가지고 원수를 갚아 내라고, 와, 이놈들이 사람을 죽이고 빨갱이라도 그래서는 안 되잖아. 인류 도덕상. 이제 그런 것이 안 좋은 점이 있고 뭐, 나는 다른 것보다도 내가 박해를 당할 그런 상황에 있어서 원래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빨갱이를 시키든 우익을 시키든 시켜놓으면 나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귀도 얇아서 잘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어쨌든지 좀 사람이 인류 사회에 있어서 해서는 안 될 그런, 경우를 벗어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그런 용납해서는, 법 이전에 용납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이 다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우리 산청에서 봐서는 유명한 사람들 다 죽었거든. 유명한 사람들, 소위[이른바] 우국지사라고 부를 정도로 뭐랄까? 우방 측에서 좀 조금 앞장설 만한 사람들, 그 자기 편이 안 된다 그래가지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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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로 경찰 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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