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권택환

  • 구술주제

    군악대 소속으로 후방에서 겪은 6·25전쟁

  • 구술일자

    2022-10-04

  • 영상시간

    9분 50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2층 호국추모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권택환 구술자는 6·25전쟁 발발 당시 인천중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학도병에 자원하여 8사단 16연대 배속 후, 중학교 시절 밴드부 활동 경험을 토대로 군악대에서 활동했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2022년 올해는 전쟁 직전부터 정전 체제까지 전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대상자로 선정하였고, 특히 백마고지 전투 70주년을 맞이하여 전선교착기에 해당되는 '고지전' 중심의 참전자 및 관련자를 선정하였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되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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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권택환

  1. 1950.12.18. 인천중학교 재학 중 학도병 자원
  2. 1951.1.20. 8사단 16연대 배속 후 군악대 배치
  3. 1955. 제대
  4. 1956. 경희대 음악과 입학
  5. 1956. 인천애향악단 활동
  6. 1958. (주)무진기업 공동운영
  7. 1990. 퇴직
구술영상 자막
<권택환>
*면담자: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면담자 : 선생님 생년월일하고 성함 좀 말씀해 주세요.
구술자 : 1933년 10월 20일생입니다. 이름은 구술자입니다. 집 택자 빛날 환자 

면담자 : 태어나신 곳은요? 
구술자 : 인천입니다.

면담자 :  6·25 전쟁 발발했을 때 전남 장성까지 내려가셨다고요?
구술자 : 그때는 이제 차편이 없으니까 걸어서 내려갔어요. 걸어서 이제 수원까지 간 기억은 나요.  그때는 아무 차나, 그때는 택시, 이런 거 버스 이런 게 없으니까 그때는 이제 그 기차, 화물차. 아무거나 그냥 그때 이제 정식 열차가 없었기 때문에 화물차만 있었어요. 이제 서기만 하면 무조건 타는 거예요. 내려가는 차는.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말하자면 이제 짐만 싣는, 이렇게 아무것도 옆에 없고 난간도 없고. 그런 위에 이렇게 씌우지 않은, 그냥 면으로 된 그 칸이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다 올라타고 앉는 거예요. 무조건 그 아무 데나 서면 또 내리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하고 조카 둘하고 6명이. 6명이 이제 이렇게 갔는데… 그렇게 해서 장성까지 내려갔는데 또 이제 차가 없으면, 이제 역 그다음 역까지 걸어가서 또 차오면 잡아타고, 그래야 이제 그 장성까지 가니 그게 우리가 내 생각에는 6월 28일 날 내려가 가지고 수복하고. 그다음에 올라올 때는 9월… 9월 10 며칠인가? 그때 올라오기로 하고 이제 인천 상륙작전 해서 9월 28일 수복이 됐거든요. 이제 그다음에 이제 그러니까 아마 10월 초순쯤 될 거예요. 아마. 그때 이제 올라오고. 그때도 이제 차가 없으니까 아무거나 일단 서울 쪽으로 올라오는 차는 무조건 그냥 트럭이나 아무 차나 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다시 왔지요. 인천까지. 그리고 이제 다시 와서 있다가, 이제 학교에 이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는 뭐 수업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그러니까 학도병으로 그때 이제 나갔죠.

면담자 : 그때가 언제였나요?
구술자 : 12월 18일인가 그럴 거야 아마. 그 당시에는 학교가 전부 다 휴교 들어간 판인데 이제 그 친구들끼리 전부 (이야기하기를) “야! 학도병으로 나가야 되는데[하는데], 나가야 하냐? 안 나가야 하냐?”(라고)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다 나가는 걸로 생각했어요. “야! 여기서 뭐하냐? 지금 학교도 못 다니고 그러는데 우리 나가자.”그러니까 이제 막 앞뒤 생각 안 하는 거죠. 무슨 군대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이런 생각도 안 하고 무조건 가자 해서 내려온 거죠. 그래서 인천에 인천여고 운동장에서, 운동장에서 모여서 “나가자! 먼저.” 그래가지고 이제 그때 굉장히 많이 내려갔어요. 몇백 명이 이제 학생들이 인천 시민, 학생들 다 모여서 내려가고 그랬는데… 이제 그때 차가 없으니까 그냥 걸어서 이제 그때도 이제 터벅터벅 수원까지 가서 수원에서부터 이제 아무 데나 이제 밤새도록 기다렸다 차오면 잡아타고. 그래가지고 마산까지 내려간 거예요. 마산.

면담자 : 입대 후 어디로 배속받으셨나요?
구술자 : 내가 8사단 16연대로 배속이 됐는데 거기서 이제 군악대로 가게 된 게 어떻게 됐냐면, 거기서 이제 있으면서 나팔수. 나팔수를 뽑는다는 그런. 각 연대에서 2명씩 이제 뽑는데 마침 우리하고 같은, 다른 학교 친구가 내가 밴드부에 있었다는 걸 알고 “야! 그 저 나팔수 뽑는데 너 갈래?” 그래서 내가 저 트럼펫을 불었거든요. 그러니까 “아, 그럼 가자.” 얼마나 좋아요? 그 전방에 안 가고 후방에 가니까. 기상나팔은 ‘빠빰빠빠빰.’아무튼, 기억이 안 나는데… 그다음에 식사는 (악기 소리 흉내) 그랬는데. 그리고 취침나팔은 ‘빰빠빰 빠빠빰.’ 다른 건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웃음) 그 이따가 이제 군악대에서 이제 전역 때쯤 돼서 이제 전부 연대로 이제 나갔는데, 거기서 이제 군악대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보니까) 나팔을 부는데 잘 불거든. 내가. 처음 부는 놈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야! 넌 어떻게 나팔을 부냐?”해서 학교에서 밴드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 너 그럼 군악대로 와.” 그래서 거기서 이제 대전 고등학교(에) 있던, 대전 중학교 출신이 이제 그 저 나팔도 아니 저 대고 치는 드럼 치던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하고 나하고 둘이 발령받았어요. 그 자리에서.

면담자 : 군악대에서 주로 어떤 공연을 하셨나요?
구술자 : 군악대장은 서서 지휘할 때만 하고 그다음에 우리가 서서 나팔 불면서 행진할 때는 앞에 선임하사가 이제 기 하나 들고 그러면서 앞에서 이렇게 이제 선두로 간다고요. 그럼 뒤에 따라서 우리가 이제 가고 편성된 거니까 맨 앞에는 이제 트럼펫, 트럼펫 그다음에 이제 다른 악기들 하고 다음에 맨 뒤에는 이제 북하고 수자폰이라고, 이렇게 어깨에다 메는 거 큰 거 있죠.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이제 뒤쪽으로 가고. 그렇게 해서 이제 행진하고 그러는 거죠. 그다음의 전방에 갔을 때 이제 전방에서 위문을 가지거든요. 우리가. 이제 전투가 끝나고 나면 연대본부로 가서 연대원들 연주를 해주는 거지. 그때 행진곡도 불어주고 클래식 같은 것도 해주고, 또 유행가도 이렇게 편곡한 걸로 해서 해주고. “노래할 사람 있으면 나와서 노래해라.” 그러면 위문공연이죠. 그런 걸 하고 그런 거죠. 그다음에 군악대는 특별히 하는 게 사단 행사, 군단 행사. 외부에서 뭐 중요한 손님이 온다든가. 손님이라는 게 주로 이제 뭐 장군이라든가? 이런 사람들 이제 뭐 참모총장이 온다든가, 군단장이 온다든가. 이럴 때는 꼭 군악대가 나가서 저 환영식을 해주거든요. 그다음에 각하한테[에게] 경례할 때도 ‘딴따다단딴!’이제 원 스타(준장)면 딴따라딴단 하고 이제 저 나팔 불어주고, 포 스타(대장)는 네 번 불어주고 말이죠. 그런 행사 그거 하면 무슨 운동회 같은 거 있을 때 나가서 막 응원해 주고 그런 거죠. 뭐 특별하게 하는 게 없죠. 뭐.

면담자 : 군악대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구술자 : 저 밤에 말이죠. 그 신병들이 전방이 이제 그 전투 들어갔던 사람들이 뭐 가면 그냥 많이들 희생되고 그러니까 계속 보충대가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밤새도록 트럭으로 들어와요. 그럴 때마다 이제 연병장에서 우리 이제 걔들 잘 가라고 말이지. 행진곡이나 나팔을 불어주는 거죠. 말하자면 사기 진작이죠. 그게. (웃음) 그럼 이제 바로 내려올 새도 없어요. 그냥 트럭에 이제 연병장 오면 거기서 인원 점검만 하고 그냥 올라가는 거예요. 전방으로. 우리 이제 사기진작이라고 그러죠. 이제 그때 이제 행진곡으로 나팔을 부니까 밤새도록 이제 우리가 밤새도록. 그거 이제 그렇게 휴전될 때까지 이제 그 생활을 했어요. 한 그게 아마 한 2주 동안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아마. ‘아유, 쟤네가 또 가서 얼마나 고생하나? 이제 가면 거진[거의] 다 많이 뭐, 대개 많이 죽고 부상당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죠. 

면담자 : 6·25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무엇일까요?
구술자 : 지금 생각하면 환희?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기쁨? 하여튼, 고생은 했지만 보람이 있다면, 보람이거든요. 그런 보람이 있다는 거 그런 걸로 아마 함축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생은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은, 그 당시에 또 나이도 어리니까 저 뭐 고생은 고생같이 생각 안 했겠죠. 그 당시만 해도.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아마 그런 어떤 보람이 있었던 걸로 그렇게 생각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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