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정기숙

  • 구술주제

    여자학도병, 6.25전쟁

  • 구술일자

    2021-07-12

  • 영상시간

    8분 54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2층 호국추모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6‧25전쟁 당시 여자학도병으로 자원하여 6사단 7연대 소속으로 최전방에서 압록강까지 포스터 및 방송 등의 정훈활동을 하였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올 해 구술자로 선정된 분들은 다양한 방면에 소속되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다. 이 분들은 각자 간호장교, 카투사, 의용군 그리고 학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셨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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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정기숙

  1. 1934. 춘천시 출생
  2. 1950. 춘천여고 1학년 학도병 지원
  3. 1950. 6사단 7연대 정훈소속 활동
  4. 2010. 6.25전쟁 60주년 유공자 훈장 수여
구술영상 자막
<정기숙>
1. 선생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1934년 7월 3일 생이고요, 이름은 정기숙 고향은 춘천이에요.
 
2.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날이 주일날인데 비가 부슬부슬 왔어요. 그래서 춘천 서면 그쪽에 3.8선 이쪽으로 비만 부슬부슬 오면 인민군이 내려와 가지고 쌀 또 소 이런 거 끌어가고 총 쏘고 그래서 그 정도인 줄 알았어요. 그래 시골 사람들이 봇짐을 지고 소를 끌고 우리 집 문 앞으로 지나가는 걸 봤어요. 그러고도 전쟁이라는 건 생각도 못 했어요. 그랬는데 방송을 듣고 남쪽에 있는 사범학교에 가서 오늘 저녁에 하루 피신했다가 내일 돌아오라고 방송을 듣고 아무 준비 없이 그 이튿날 책가방 싸가지고 그러고 이제 사범학교를 갔는데 춘천 시내에 폭탄이 떨어지고 막 불바다가 됐어요. 그래서 전쟁이 난 줄 알고 그날로 그냥 남쪽으로 피란 갔죠.

3. 피란길에 나서게 됐을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참담했죠. 뭐 앞이 캄캄했죠. 어떻게 되나 하고. 그래서 팔봉산 그 높은 산을 그 캄캄한 밤중에 산을 넘어서 남쪽으로 피란 갔어요. 

4. 피란길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게 뭐 잘 데가 없었어요. 집집마다 피란민들이 다 차지하고 부엌에도 겹치도록 그냥 방에 그렇게 모여서 눕지도 못하고 앉고 그것도 자지 못해가지고 담배 곳간 있죠 거기 가서 잠자고 그러고 또 이제 아침이면 또 가고 배가 고파서 그냥 먹을 건 없고 하면은 밭에서 무 뽑아먹다가 혼났어요. 그 빈속에 무 먹고 속이 막 쓰려가지고 그래서 이제 배추 같은 거 이제 뽑아먹고 그러면서 피란 갔어요.
충주까지 갔어요. 충주까지 갔는데 인민군이 낙동강 근처까지 투입했다 그래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한 한 달간 그냥 충주에 머물러 있다가 집에 돌아왔죠.

5. 어떻게 학도병에 지원할 생각을 하셨나요? 
 유엔군이 인천 상륙하고 또 서울이 수복되고 춘천도 수복되면서 그때가 아마 9월 25일 그때쯤 될 거예요. 그래서 학교에 이제 모집해서 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교련선생님. 그때는 고등학교 학생은 학도호국단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교련 선생님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씩 훈련받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선생님이 전교생 운동장에 집합하라 그래서 집합했는데 6사단 7연대 장교 두 명이 와가지고 학도호국단에서 정훈부에서 네 사람이 필요하니까 희망자 손들라고 그러니까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다 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교련 선생님한테 노래 잘 하고 음변 좋은 학생 네 명만 선출해달라고 그래서 이제 가게 된 거예요.

6. 최전방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춘천방송국 여자 아나운서 두 명 하고요 미대생 두 명, 그러고 우리 춘천여고 네 명, 또 사범학교 우리보다 1년 선밴데 그 분 하나 그렇게 해서 이제 활동했어요.
 정훈부 버스에서 방송하고 포스터 붙이고 통일 노래 부르면서 최전방 뒤따라가면서 북진했어요.

7. 전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북진하면서 가다가 그 인민군 패잔병들이 산에 숨었다가 우리 버스에다가 총 쏘고 또 지뢰도 터지고 해가지고 아나운서가 팔도 다치고 또 차도 다 망가져서 이제 차도 바꾸고 그러면서 압록강까지 북진했어요.
 그때 압록강 가서 너무 감개무량 해가지고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통일이 된 줄 알고 대한민국 만세 부르면서 너무 기뻐서 뛰었어요.
 그때 그렇게 하고 나서 하루인가 이틀 지나서 비상 명령이 내렸어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평양 근처까지 투입했다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남쪽을 향해서 그냥 걸었죠. 산으로. 밤이고 낮이고 밤엔 너무 캄캄하니까 같이 이렇게 손을 잡아야만 돼요. 손을 놓치면 거기서 낙오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산을 넘어서 넘어서 가다가 어떤 때는 골짜기로 가는데 캄캄해서 옆 사람도 안 보이는데 발에 뭐가 밟히고 걸치고 그래요. 그러는 걸 이제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다가 나중에서야 이제 그게 국군의 시체였어요. 중공군에게 피습당해가지고.  그런 일도 있었고 그렇게 이제 산을 넘고 남쪽으로 가다가  평안북도 시천하고 강계, 그 중간 지점에서 중공군에게 갑자기 피습을 당했죠. 

8. 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그때가 이제 한 연대가 7연대거든요. 한 연대가 거기까지 가서 양쪽에 산이 있고 그 골짜기를 따라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나팔소리가 나고 꽹과리 두들기고 그냥 뭐 막 고함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양쪽 산에서 그냥 따발총을 막 쏘는 거예요. 그래 총알이 비 오 듯했어요. 그런데 그냥 골짜기로 그냥 막 뛰어서 올라가면서 총 맞으면서 앞뒤 사람 총에 맞아 쓰러지고 그래서 나는 곧장 가다간 총에 맞을 것 같아서 그냥 옆에 산으로 기어 올라갔죠.  그래서 저는 거기서 이제 무사히 목숨은 건졌는데 올라가다가 한참 올라가는데 총소리가 멎었어요. 조용해졌어요. 그래서 앉아서 쉬고 있는데 그 산 위에서 중공군들이 요란하게 떠들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그냥 엎드려서 죽은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머리 위에로 계속 지나가는 거예요. 중공군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한없이  지나가더니 나중에 조용해졌어요. 그래서 엎드려 있다가 밤낮이고 잠 못 자고 걸어갔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그냥 잠이 들었어요.

9. 가족들에게 참전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내 주위에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런데 결혼해가지고 어떻게 애기도 낳고 바쁘게 살다 보니까 그 옛날 일을 까맣게 잊고 생각이 안 났어요. 그래가지고 현실에 살아가면서 일부러 얘기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살다 보니까 얘기를 못 했던 거예요. 

10.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후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학도병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데 대해서 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러고 후손들도 그리고 이 6.25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아야 돼요. 참 참혹한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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