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류영봉

  • 구술주제

    카투사1기, 6.25전쟁

  • 구술일자

    2021-07-19

  • 영상시간

    8분 51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3층 유엔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6·25전쟁 당시 카투사 K군번 1기로 UN군에 배속되어 활약하면서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등을 직접 경험하고, 전쟁 이후에는 미8군 병원에 근무하시면서 평생 환자를 돌보면서 봉사하셨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올 해 구술자로 선정된 분들은 다양한 방면에 소속되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다. 이 분들은 각자 간호장교, 카투사, 의용군 그리고 학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셨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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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류영봉

  1. 1937 대구시 출생
  2. 1950. 8. 카투사 징집
  3. 1950. 9. 15. 인천상륙작전
  4. 19503. 11~12. 장진호 전투
  5. 1950. 12. 흥남철수
  6. 1954. 카투사 1기 전역
  7. 1958. 5. 25. 미 8군 병원(대구) 근무
  8. - 6.25전쟁 참전 유공자회 대구 남부지회 부회장
구술영상 자막
<류영봉>
1. 선생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에 1932년 6월 15일 이름은 류영봉 의성군 단북면 신하리 두메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2. 카투사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건가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일본에 있던 미 24사단, 또 25사단 2개 사단이 한국전쟁에 조기 투입됐습니다. 
2개 사단이 막상 전투에 참가하고 보니까  한국군하고 북괴군하고 얼굴이 비슷하고 분간을 못했고 또 북괴군이 피란민 속에 들어가 가지고 민간인 복장으로 미군을 향해서 총을 쏘게 되니까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 얘기를 맥아더 장군하고 또 이승만 대통령께서 빨리 한국군을 징집해가지고 유엔군, 미군에 배속시켜라. 이게 명령이 이제 7월에 하달 됐습니다. 

3. 카투사로 입대를 하셨는데, 어떻게 알고 지원을 하신건가요? 
  8월 16일 날 제가 학교 가는 도중에 노상에서 경찰관 아저씨께 징집됐습니다. 
 그 당시 전시라 나이와 학벌 같은 거 관계없이 남자라면 무조건 검문해서 징집시켰습니다. 나이는 19살이었지만은 딴 사람들은 그 당시 서른다섯 살 여섯 살 되는 사람들도 같이 징집됐습니다. 대구에서 한 2,000명이 징집됐는데 그 사람들 백 명 단위로 엮어가지고 일본에 있는 유엔군 미 7사단에 배속됐습니다. 거기서 3주간의 훈련받으면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제 카투사 1기생으로 채택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가족분들과 연락은 어떻게 취하게 되었나요? 
  학교 간다고 이제 나간 아이가 이틀 동안 안돌아오니까 어머니께서는 아침 일찍이 절에 가셔서 부처님께 기도하고 저를 찾아다녔는데 알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징집됐기 때문에. 

5. 카투사의 훈련은 어땠나요? 
  미국 교관이 훈련을 시키는데 전부 다 영어로 하는데 고통이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로 하기 때문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대학 나와도 대학교수도 그때는 영어를 못했습니다. 학생들 중에 몇 사람이 영어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면서 지목하는 바람에 제가 지목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미군들하고 회화를 하니까 자기들하고 통한다 해서 저를 조교를 시켰습니다. 그것이 많이 도움이 돼가지고 3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6. 인천상륙작전 투입 후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미 7사단 17연대 의무중대에 배속돼가지고 3주간의 훈련 받고 한국 부산항에 도착해 가지고 일주일 걸려서 훈련을 완전히 해서 인천상륙작전에 임했는데 소총부대들이 항상 전방에서 싸우고 저는 위생병이다 보니까 뒤에서 들것을 들고 다닙니다. 우리가요.   
남침을 받아가지고 우리가 공격당했지만은 이제 우리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돼가지고 우리가 북진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가 막상 혜산진에 도착하니까 압록강 물은 꽝꽝 얼었고 북한 주민 사람들이 우리 갔다고 환영해 주고 막 이래가지고 3일 동안에 우리가 있었는데 저는 너무 감격해가지고 얼음을 깨 먹으면서 이제 남북통일 되는가 싶어 했고 미군들은 이제 자기네들 한국전쟁이 끝나면 자기는 미국에 있는 집에 갈 수 있다고 말이죠. 서로 감격해가지고 얼싸안고 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3일 만에 그 꿈은 산산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3일 만에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 장진호 전투는 어떤 전투였나요? 
  중공군이 매복하고 있는 장진호였기 때문에 거기는 먼저 초산으로 진입하려다가 못한 미 해병대 1사단이 거기에서 포위 당해 가지고 오도 가도 못했는데 우리가 도착되니까 2개 사단이 완전히 포위당했습니다. 
 중공군이 우리에게 공격 해오면 우리가 전투하다 보면 부상자들을 처치 못하고 우리가 후퇴합니다. 그 이튿날 가보면 다 동사돼가지고 다 죽어있습니다. 그거 담가(들 것)에 실어야 되는데 싣지도 못하고 서서 앉아있는 모습으로 죽었기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말이죠. 그렇게 후송하는데도 힘들었는데 그렇게 추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황초령 다리가 중공군의 폭격에 끊어져가지고 우리가 넘지 못해가지고 또 고생했는데 미 해병대 공병대들이 이제 그것(다리)을 가설해가지고 우리가 넘어왔습니다.

8. 흥남철수 작전 당시 상황이 어땠나요? 
  흥남에 도착하니까 흥남에는 피란민들이 수 십 만 명의 피란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미군들이 후퇴한 것을 듣고 배에서 자기네들도 태워주기를 원한다고 마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는 한정돼있고 피란민들은 많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에게 우리가 얼마라도 피란민을 후송해야 된다 피란시켜야 된다 하니까 그분의 기지로서 배 안에 들었던 대포, 탱크, 물자 같은 것을 배 안에 있던 것을 다 내려가지고 흥남 부지에 쌓아놓게 했습니다. 그만큼 10만 명의 북한 피란민을 배에 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피란민이 절대 피란 못했을 겁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라면은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들의 영웅입니다. 그분들 아니면 피란 못했을 겁니다.

9. 전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우리 참전 유공자회 본부에서 카투사에 대해서 또 얘기하고 또한 한국전쟁을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된다 교육을 시켜야 한다 해가지고 제가 교육 담당관으로서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해서 4번씩 우리가 학교 찾아다니면서 이제 강연을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 아이들이 아직도 막상 참여하고 보니까 학생들이 너무 모릅니다. 왜냐하면 6․25전쟁이 어떻게 났으며 또 언제 났는지도 모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상을 하고 또한 우리들이 직접 영상을 통해서 내가 참전한 곳이 어느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니까 아이들이 더 호기심을 갖게 됐어요. 
6․25전쟁을 바로 알기 교육을 우리 참전 유공자에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봉사활동 하고 또한 아이들에게 후손들에게 6․25전쟁과 우리나라가 어떻게 발전돼서 이렇게 발전할수 있었는지를 교육으로 이제 알리고 싶은 마음을 계속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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