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최선분

  • 구술주제

    여자의용군, 6.25전쟁, 베트남전쟁

  • 구술일자

    2021-07-19

  • 영상시간

    10분 53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3층 기증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최선분 예비역 중령은 6·25전쟁 당시 여자의용군 3기로 지원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받은 후 후배 양성에 힘썼으며, 이후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소속되어 한국군의 사기를 촉진시키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2020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구술영상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구술영상은 이후 전쟁·군사 관련 학술연구 및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며 또한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올 해 구술자로 선정된 분들은 다양한 방면에 소속되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다. 이 분들은 각자 간호장교, 카투사, 의용군 그리고 학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셨다. 구술영상 인터뷰 질문 내용 역시 구술자 분들의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맞게 진행했으며 서로 겪으셨던 다양한 전쟁의 기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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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최선분

  1. 1935 서울시 출생
  2. 1953. 2. 2. 여자의용군 3기 입교
  3. - 정식 행정업무 교육 수료(최초)
  4. 1956. 1. 14. 장교로 임관
  5. - 도미유학
  6. - 베트남전쟁 파병, 「평화와 건설」 잡지 발간
구술영상 자막
<최선분>
1. 선생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1935년 10월 15일, 이름은 최선분이고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태어났습니다.

2.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전쟁이 시작된 거는 제가 여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날이 6월 24일이었어요. 국방색 같은 그런 비행기가 저공으로 해서 날아오고 폭음 소리가 요란했죠. 선생님도 이제 그런 걸 같이 목격을 했으니까는 아 안 되겠다. 모두들 책상 밑으로 들어가라고 그렇게 얘기해서 책상 밑에 들어가 있었죠. 그리고 난 다음에 한참 있다가 다시 우리 선생님이 아무래도 좀 위험하니까 집으로 조심해서 집으로 귀가하라고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날 밤을 자고 난 다음에 25일이 됐는데 막 피란민들이 엄청나게 모두들 이렇게 짐들을 지고 그러고 내려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이제 아 이게 전쟁 나는가 보다. 이렇게 다 느꼈죠. 모두들. 그러고 난 다음에 28일 날 밤에 요란하게 폭격 소리가 많이 들렸어요. 그러더니 이제 동이 트고 나서 아침이 되니까는 이게 한강이 폭격, 한강 다리가 폭격이 됐다고 저희 아버지는 늘 그 라디오를 듣고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 굉장히 위험하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3. 전쟁 시기 피란은 안가셨나요?
  경복궁 앞 종로쪽에 수성 초등학교(초등학교)가 있었어요. 거기에 저희들을 학교에서 오라고 그러더니 인민군 또는 그런 선전부 요원들이 거기에 다 우리들을 집합시켜 놓고는 인민군에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손 들으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난 그거를 보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부모님한테 그런 얘기를 다 드렸더니, 이제부터 학교가지말라고, 위험하니까 가지말라고 며칠 지난 다음에 아무래도 안되겠다 외갓집으로 저 혼자 피란을 갔어요.

4. 1.4후퇴 때 피란을 가신 상황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이제 1.4 후퇴 때  1.4 후퇴가 국군이 신의주까지 갔던가요? 뭐 백두산 물도 병에다 넣어 가져온다고 그런 말도 있었는데. 중공군이 내려오다 보니까 국군이 이제 후퇴하는 거야 다시. 그러다 보니까는 피란민들이 또 생기기 시작이 됐죠. 우리도 이제 대충 짐을 정리해가지고 우리 이모가 안양에 계셨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 있는 우리 이모 집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밤에는 조명탄이 하늘을 올라 날고 비행기는 뜨고 총소리 나죠, 잠도 제대로 잘 수도 없어요. 근데 이거는 우리 아버지가 여담이지만 식구들은 잊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시더라고. 나는 생전에 아버지가 우시는 걸 처음 봤어 그때. 참 너무나 기가 찬 일이죠. 비참하고 참혹하고 이 많은 피란민들. 그러면서 이제 해가 뜨면 우리는 또, 남쪽으로 가야 돼. 거기 머무를 수가 없어요. 

5. 여자의용군에 직접 지원을 하신건가요?
  (1945년) 그렇게 하고 이제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말 하니까 그때부터 이제 한글 공부도 했죠. 그때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잔 다르크라는 책을 봤는지 만화를 봤는지 여하간에 그 잔 다르크라는 여인에 대해서 관심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이면 그 12살 정도 됐는데 아 나는 다음에 이런 여전사 같은 잔 다르크 같은 여인이 돼야 되겠다. 그다음에는 내가 여학교 갔을 때 우리 학교에 자매 선생님이 부임을 했는데 이화대학 체육과를 나오신 분이셨어요. 부임 인사를 했는데 군복 유니폼을 입은 선생님이 체육 선생님이었죠. 그래 이제 그분이 탁구도 잘 치고 그래서 저는 그분 선생님하고 굉장히 친하게 잘 지냈어요. 그래서 참으로 여학교 생활을 재밌게 지냈는데 그때 그 모습도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영향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 거기서 이제 지구병사구 사령부에서 시험 날짜를 가르쳐줘서 시험을 봤고 그때 합격이 돼서 언제까지 어느 역으로 집합하라 그래요. 그 역에서 도착해서 간 곳이 광주 보병학교. 광주 보병학교에서 모든 군사 훈련을 거기서 했어요. 장교고 사병이고 간에

6.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베트남전에 참전할) 서류를 내 가지고 냈더니 그 담당 인사참모부 인사과장이 저를 호출해서 당신 가정이 있는데 당신 남편이 가기를 허락하느냐 그렇게 물어봐요. 글쎄 난 모르겠다. 남편 의향이 어떤지는. 그러면은 이 허락서를 서류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남편한테 가서 그런 서류를 내밀고 했더니 당신한테 달린 거다. 당신이 가겠다고 생각하면은 당신이 가는 것이고 또 당신이 국가에 봉사하고 있는데 국가의 부름인데 다른 단체하고는 다르지 않느냐. 그러니까는 당신이 결정하라고. 그렇게 해서 저는 가겠다고 했죠. 그래서는 월남(베트남)을 지원하게 된 겁니다.

7. 베트남전쟁에서는 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셨나요?
  주월사령부 내에 심리전과가 있었는데 심리전과라는 곳은 대민 업무를 보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월남(베트남)에서 태권도 교육도 시키고 군인들이 심리전과는 군인들이 종교 기관에 가서 봉사도 하고. 이런 거를 주관하는 데가 심리전과죠. 그런 거를 이제 군인들이 가서 하니까 그럼 그런 거를 사진을 다 찍어가져 오면은 그 군인 사진사들이죠. 사진사들이 다 찍어오면은 그거에 관한 거, 그러니까 월남(베트남) 민간인들의 생활상 그런데 가서 군인들이 도와주고 이런 일들을 하는 게 대민 사업하는 게 이런 거. 또 홍보물 저 같은 경우는 이제 홍보물을 제작을 해서 그런 거를 월남(베트남) 군인들한테도 배포해 주고 또 이제 우리가 다녔던 그러한 기관에도 배포해 주고 이런 일을 했죠. 

8.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후손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가요?
  그래요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전 휴전이 됐다 하지만 전쟁 중인 거나 다름없고 그다음에 6.25 전쟁 엄청난 전쟁이잖아요.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과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또 희생당하고 이랬던 일이 있는데 우리가 이거를 잊어서는 안 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린 평화 통일로 가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가의 안보태세 또는 방어태세 이런 거를 늦춰서는 안 되고 더 강화시켜서 우리 젊은 사람들이 많은 이런 전쟁기념관에 와서 이런 교육도 받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지 언제 전쟁이 또 올지도 모르는 거니까 이런 각오로 우리는 굳건히 해야 된다. 라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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