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최영섭

  • 구술주제

    해군 / 6·25전쟁

  • 구술일자

    2020-07-20

  • 영상시간

    10분 52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3층 국군무기발전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최영섭 해군 대령은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임관 4개월 만인 1950년 6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으로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하였다. 전역 후에는 <6·25 바다의 전우들>을 집필하기도 하고 추모비 건립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 입교, 대한해협해전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전쟁의 아픔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 등을 구술하였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요 전쟁 참전용사, 전쟁·군사 관련 주요 인물, 유물기증자 등에 대한 구술기록을 생산·관리하는 구술영상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기획하였다. 2020년은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 육군·해군·공군 각 군별 참전용사 1명씩을 대상으로 구술채록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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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최영섭

  1. 1928 강원도 평강 출생
  2. 1947.09 해군사관학교 3기생 입교
  3. 1950 해군사관학교 졸업
  4. 1950 백두산함 갑판사관 주요 작전 참전(대한해협해전)
  5. - 해군 최초의 구축함 충무함(DD-91) 2대 함장 취임
  6. 1968 대령 예편
  7. - 해양소년단 고문 활동, 안보 강연, 승전비/추모비 건립 운동 등
구술영상 자막
<최영섭>
1. 구술자 소개
이름은 최영섭 
출생년도는 1928년 4월 2일, 출생장소는 지금 휴전선 이북이에요.강원도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
2. 해군사관학교 입교
내가 고향에 가보니까 소련군이 들어온 거예요. 소련이 약탈하고 강간하고 행패가 심했어요. 이렇게 행패가 점점 심해져서 이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여기 있다가는 사람 구실 못하겠다. 그래서 1년 기다리고 있다가 1947년 2월 15일에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남쪽으로 내려와 보니까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해방직후라 직장이나 이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혼란스러운 시기 아니에요. 그러면 군대에 들어가서 나라를 지켜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진해에서 한 6개월 기다리다가 사관학교 3기생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게 1947년 9월 1일.      
3.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 백두산함
바다를 지키려면 군함이 있어야 되는데 정부에 군함 살 돈이 없는 거는 뻔한 얘기에요. 우리 해군들이 손원일 제독이 참모총장일 때 나라에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군함을 사달라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끼리 돈을 모아서 군함을 사오자 그랬어요. 그래서 해군 장병들이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서 돈을 내고 장병 부인들이 뜨개질을 하거나 양복을 수선해서 돈을 모았던 거예요. 그래서 만든 돈이 850만원쯤 됐어요. 손원일 제독이 그 돈을 가지고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어요. 그것이 아마 10월 15일쯤 될 거예요. 조선일보에 기사가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대통령이 4만 5천 불을 나중에 마련해줬어요. 그래서 그 돈을 갖고 미국에 군함을 사러 가는 거 아니겠어요. 미국에 가서 보니까 상선학교 실습선이니까 대포가 필요 없거든요. 항해실과 기관실만 있으면 된단 말이에요. 통신실하고. 하와이 들어가서 대포를 사서 배에 달았어요. 대포를 다는데 석 달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대로 한국으로 오는데 오다가 기름이 떨어져서 괌에 가서 기름을 싣고 포탄 100발을 샀어요. 돈이 없어서 100발밖에 못 산거죠. 그리고 진해로 들어온 거예요. (1950년 2월 25일 졸업을 하고) 내가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 갑판사관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우리 동기생 한 사람은 김종식인데 기관장으로 발령 나고 1950년 4월 10일 백두산함이 진해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거기 승조해서 갑판사관으로 근무하게 된 거에요.
4. 6·25전쟁 첫 해전, 대한해협해전  
우리 돈을 내서 군함을 샀다는데 대포가 달려있고 멋있다고 하니까 구경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군함을 정비하고 동해에 가서 부산, 묵호 기지를 돌면서 구경시켜주고 서해를 돌면서 인천, 군산, 목포 기지를 구경시켜주고 6월 24일 밤 11시 반에 백두산함이 진해로 다시 돌아왔어요. 우리 승조원들이 잠에 든 것은 6월 25일 새벽 1시에 다 침실에 들어가서 잤어요. 근데 아침 10시쯤 되니까 진해기지 사령관이 있었어요. 김성삼 대령이라고. 김성삼 대령이 오더니 함장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우리 배가 어제 밤에 11시 반에 들어와서 영외 거주자들은 전부 집에 갔습니다.’ ‘지금 안 계십니다.’하니까 빨리 불러오라는 거예요. 출동준비가 끝난 것이 오후 3시. 오후 3시에 이제 나가는 거예요. 나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뭐 때문에 나가는지 물어보니까 사령관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 동해에 인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 견시가 보고를 하는 거예요.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보임. 이렇게 보고를 하더라고. 보니까 검은 연기가 흐르고 있었어요. 시간이 9시에서 10시 가까이 됐어요. 그 다음에는 깜깜해지니까 서치라이트 대고서 봤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까 앞에 대포가 이렇게 달려있더라고요. 커버를 씌웠는데 대표는 기니까 보이지. 그리고 뒤에 함교 양쪽에 기관포가 달려있더라고요. 갑판을 보니까 무장군인이 가득 타있어요. 백두산함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포탄이 아까워서 사격연습을 한 번도 못하고 모의탄을 가지고서 훈련을 했어요. 실탄이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그건 못 봤다고. 첫 발이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 실탄이 안 나가면 전쟁은 끝나는 거죠. 그래서 첫 발을 쏘니까 빵 하고 나가더라고요. 실탄이 나가는구나 하고 만세를 불렀다고. 그랬더니 첫 발이 나가자마자 소리가 들리자마자 적함은 주포가 대포 하나에 기관포가 양쪽에 있으니까 그냥 쏘아오더라고요. 우리가 그때 전쟁할 줄 몰랐어요. 전쟁에서 제일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하냐. 적의 화점을 때려야 돼요. 적의 화점, 포를 공략하고 그 다음에 공격에 들어가야 돼요. 우리는 기관실하고 그 다음에 함교만 공격했어요. 그러니 포가 살아있다고. 적함이 가라앉으면서 대포를 쏜 게 그게 들어맞은 거예요. 조타실로 뚫고 들어와서 자이로컴퍼스가 포탄에 맞아서 터지고 조타사 김창학 삼등병조가 거기서 쓰러졌어요. 그리고 옆에 있던 김종식 소위가 발이 절단되고. 포탄 하나는 주포 갑판에 떨어졌어요. 포 장진수 전병익 이등병조가 거기서 쓰러졌어요. 그리고 주포 전화수 김춘배가 다리를 맞았어요. 그렇게 동료들이 쓰러져 나갔어요. 적함은 이제 거의 다 가라앉았고 우리는 이제 부상병들을 수습해야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전투는 결국 적함을 격침시켰고 우리는 부상병들을 수습했던 거예요.    
5. 대한해협해전에서 희생된 전우들
우리 배는 작으니까 의무실이라는 게 없었어요. 의무실은 아니지만 갑판 밑에 사병 식당이 있었어요. 사병 식당이 즉 의무실이야. 그래서 깡통 있잖아, 군의관 목에다 깡통을 달아줬어요. 깡통에다가 토하면서 치료하는 거죠. 그리고 위생병들이 같이 돕고. 그런 상태인데 내가 들어가 봤어요. 들어가 봤더니 김창학 삼등병조는 가슴을 맞아서 폐가 허옇게 보일 정도고 전병익 이등병조는 배를 맞아가지고 내장이 드러났더라고요. (실제로 김창학 삼등병조가 복부 부상을 입었고 전병익 이등병조가 흉부 부상을 입었다.) 근데 그것을 지금 지혈하는 거죠. 그렇게 힘든 데 나를 보더니 ‘갑판사관님 적함은요?’하고 묻더라고요. 숨이 꺼져가면서도 적은 어떻게 됐냐 이거지. ‘적함은 격침됐다.’ 내가 그랬죠. ‘이놈들아 살아야 돼. 정신 차려.’하고 내가 고함을 질렀어요. 적함이 격침됐다는 얘기를 듣더니 부상병들 얼굴이 환하게 피더라고요.
6.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
대한해협해전 백두산함이 부산을 지킨 것은 6·25전쟁의 분수령이다. 6·25전쟁에서 부산항을 지켰기 때문에 유엔군이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부산 항구에 얼마나 들어왔냐. 6·25전쟁 때 인원 500만, 물자 5200만 톤, 기름 2200만 톤이 부산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지켜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이 낙동강전선을 지켜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겁니다. 대한해협해전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켜낸 전쟁이다.   
7. 문산호 선원들 공적 발굴 활동
장사상륙작전이란 것이 있었어요. 우리 군대가 한 게 아니라 소년병들 772명을 태워가지고서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었어요. 인천상륙작전 양동작전은 양쪽에서 했어요. 하나는 군산, 하나는 장사동. 동해안 장사동은 소년병 772명을 육군 대위가 지휘해가지고 문산호에다 태워가지고 상륙작전을 한 거예요. 그런데 문산호는 결국 거기서 좌초가 된 거 아니에요. 적과의 거리가 200m밖에 안 돼. 직격탄을 맞은 거죠. 그래서 선장 이하 9명이 거기서 전사를 했어요. 적탄을 가슴에 맞고 다 전사한 거예요, 자기소임을 다하고. 그런데 소년병 772명에 대한 기념탑을 세운다고 신문에서 봤어요. 그것은 당연히 세워야지. 그런데 그 병력을 수송한 문산호 얘기는 하나도 없어요. 문산호 선원이 민간인이래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장렬하게 작전에서 전사한 거다. 이분들을 기려야겠다고 내가 생각을 했어요. 선장은 가족들이 다 떠나고 딸 하나가 제주도에 살더라고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가족을 다 찾아가지고서 문산호 가족들한테 무공훈장을 다 드린 거죠. 그 가족들도 그렇고 우리 국민들이 볼 때도 나라를 지키다가 전쟁터에서 전사를 하고 끝까지 나라를 지킨 사람들을 나라에서 이걸 챙겨야 되는 거예요. 
8. 인터뷰를 마치며
우리 후손들이 잘 살아야 돼요. 행복하게 자유를 누려야 돼요. 
이렇게 되려면 울타리가 든든해야 돼요. 울타리는 국가에요.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 즉 국가안보가 튼튼해야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연면히 살아갈 우리 후대들이 행복하게 살 땅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켜 달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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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섭 해군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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