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구술자

    박경석

  • 구술주제

    육군 / 6·25전쟁

  • 구술일자

    2020-07-13

  • 영상시간

    10분 45초

  • 구술장소

    전쟁기념관 3층 유엔실

  • 주관기관

    전쟁기념관

  • 소개

    박경석 육군 준장은 195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입학하였다. 입학 25일만에 6·25전쟁에 투입되어 포천전투에 참전하였고 부산까지 후퇴하여 17세에 최연소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현재 전쟁기념관에 있는 시비 <조국>과 <서시>의 작가이기도 하다. 6·25전쟁 투입 첫 날의 기억, 북방 1077고지 전투에서 인민군 포로가 됐던 경험과 전쟁기념관 설립과 관련된 일화 등을 구술하였다.

개요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요 전쟁 참전용사, 전쟁·군사 관련 주요 인물, 유물기증자 등에 대한 구술기록을 생산·관리하는 구술영상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기획하였다. 2020년은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 육군·해군·공군 각 군별 참전용사 1명씩을 대상으로 구술채록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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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약력

성명박경석

  1. 1933 세종시 출생
  2. 1950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 입교
  3. 1950 6·25전쟁 참전(포천전투, 한강전투 등)
  4. - 미국 Fort Bening 보병학교 장교기본과정 졸업
  5. -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
  6. - 파월 제1진 맹호사단 초대 재구대대장
  7. 1979 1979~ 이후 전업 작가 활동
구술영상 자막
<박경석>
1. 구술자 소개
1933년 1월 1일 세종시 조치원에서 출생했습니다. 박경석입니다.
2. 육군사관학교 입교
구 제 6년제 대전중학교 5학년 재학 시절에 신문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아주 기다리던 소식이라 반드시 입교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시험을 보려고 하니까 졸업생이 아니기 때문에 예비시험을 거쳐야 된다고 해서 수도여중에서 예비시험을 보고 합격하였고, 용산중학교에서 본 시험을 보고 합격하였습니다. 연령미달인데도 저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3. 6·25전쟁 발발과 포천전투 투입
1950년 6월 1일 날 입교해서 1950년 같은 해 25일 만인 6월 25일에 전쟁이 났기 때문에 25일 동안 배운 것은 군대예절과 제식훈련, 그리고 M1소총의 3발씩 영점 조준사격 훈련만 받았지요. 제대로 훈련을 안 받았기 때문에 무조건 상부에서 사격하라고 하면 사격하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어요. 인민군이 개미떼처럼 올라오는데 우리가 일제 사격을 하니까 인민군이 고목나무 쓰러지듯이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그런데도 워낙 포탄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사방에서 희생자가 많이 났지요. 그래서 마침내 상부에서 후퇴 명령이 내려와서 태릉 화랑대로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태릉에 와서 최종점검을 해보니까 330명 동기생 중에서 8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4. 부산으로 후퇴 그리고 육군소위 임관
후퇴를 해서 학교에 도착하니까 학교 본관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계속해서 남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광나루를 거쳐서 수원까지 후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특공대를 모집했어요. 한강선 방어가 시작됐으니까 한강선 방어에 나가라하고. 그래서 생도 중에 일부가 지원을 해서 서로 트럭을 타고 한강선에 배치돼서 나는 맨 앞에서 원창희 생도와 함께 소총을 쏘면서 인민군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 전투하고 우리는 또 후퇴해야만 됐지요. 부산 동래중학교에 오니까 육군사관학교 해산명령이 나왔어요. 그래서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합쳐져서 육군종합학교가 탄생했습니다. 육군종합학교에서 3개월간 훈련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했지요. 
5. 북방 1077고지 전투와 인민군 포로 생활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후퇴를 했지요. 그래서 중공군이 개입하니까 중공군 세력과 합쳐서 남진을 시작했어요. 평창 북방에 1077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나왔지요. 3대대 전체 대대공격이에요. 우리 3소대는 3대대 10중대의 소대로서 공격을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소대장은 앞장을 서야 합니다. 앞장을 서다가 공격이 성공하는 줄 알았는데 인민군들이 벌떡 일어나서 수류탄 하나가 날아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의식이 없었습니다. 눈을 떠보니까 인민군 야전 치료소에요. 인민군 사단장이 나를 보더니 몇 살이냐고 묻더라고요. 17살이라고 대답하니까 ‘근데 어떻게 국방부는 어린 소년을 소위 임관 시켜서 내보내지?’ 하더라고요. 인민군이 남침을 안했으면 4년 후에 육군소위가 될 텐데 인민군이 오는 바람에 급하게 소대장 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임관시킨 것 같습니다. 하니까 ‘아 그렇구나.’ 하더라고요. 그것이 인민군이 남침을 자인한 것 아니에요? 그 사단장이. 그런데 남쪽을 향해서 가다가 내무서원한테 붙잡혔어요. 거기서 내가 이제 혹독한 포로취급을 당한 거예요. 강압적인 심문, 강압적인 감시, 그리고 식사라든가 이런 것도 거의 죽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줘서 아주 어려운 고비를 한 달 반 동안 했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서 우리 동기생 하나가 포로로 끌려오는 것을 만났어요. 박준승 소위에요. 그 소위와 합심해서 탈출했습니다. 
6. 육군소위 박경석의 묘
이제 남쪽에 와서 다시 군복을 갈아입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수소문을 해보니까 가족들이 우리 고향 조치원에서 후퇴해서 부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까 깜짝 놀라지요. 죽은 사람이 살아와서, 장례식까지 하고 이제 완전히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살아서 오니까 가족들이 대단히 난리가 난거예요. 그래서 그 후에 알고 보니까 박경석 소위의 무덤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생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동작동 국립묘지에 내 군번을 대고 찾아가니까 15-2 묘가 바로 박경석 소위의 묘라는 것을 내가 발견했습니다.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존치되어있던 묘비는 철거가 결정되었다.)
7. 육군사관학교 참전생도상
제가 생도 2기 회장이 돼서 굉장히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86명을 육군소위로 추서 임관시키고 우리 생도 2기가 명예를 회복해서 육군사관학교에서 명예졸업식을 거창하게 열어주었어요. 후배들이 고마운 일을 우리 선배한테 한 거죠. 그 후에 이제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2기상을 세워서 거기에 내 시 ‘생도송’, 이 시가 거기에 붙어있게 된 겁니다. 
8. 전쟁기념관 건립에 얽힌 비화
군복을 벗고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전쟁기념관 건립이 추진됐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결심을 한 거예요.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 이제 전쟁기념관이 설립되게 됐는데 그때 설립하기 위한 초대 전쟁기념사업회장이 이병형 장군이에요.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오면서 상황이 바뀌어졌어요.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이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었는데, 조선총독부를 없애고 그 박물관에 있는 모든 박물을 전쟁기념관에 연계해서 전쟁기념관을 중앙박물관으로 하는 것으로 거의 결정되다시피 했어요. 이병형 장군하고 나하고 둘이 합심해서 그때 김영삼 대통령한테 개인적으로 무엇을 자문하는 역할을 하는 기회가 있어서 내가 강력히 진언을 했어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서 전쟁기념관을 그대로 두기로 해서 이게 준공이 된 겁니다.
9. 전쟁기념관의 ‘서시’와 ‘조국’
서시는 전쟁기념관에 그야말로 정신, 그것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기본적인 시에요. 다음에 조국이라는 시는 반드시 후대에 알려야 될 내용을 응축한 겁니다. 우리 세대는 기가 막힌 세대지요. 6·25 전에 이미 침략시대, 일제침략 시대를 겪고 6·25전쟁, 월남 전쟁, 경제발전, 또는 민감한 정치적인 혼란 그걸 다 겪고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됐습니다. 선진국이 될 때까지의 응축된 조국에 대한 개념이지요.
10. 인터뷰를 마치며
전쟁이 비참하다는 것은 다 알지요. 그러나 겪어본 사람 외에는 그 참상을 모릅니다. 후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더구나 동족 간에는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모든 힘은 국민이 갖고 있는 거예요. 국민들이 전쟁의 무서움을 알고 전쟁이 얼마나 희생이 많은 가를 깨우친다면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지막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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